군국주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건만.
주로 국내 학자들은 일본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근대화의 실패가 식민지화와 반(半)식민지화를 야기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기본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악질적인 식민지화 과정이었다.이 내용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온 동아시아에서 중국 중심의 국제 관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중국 스스로 인정한 것이었다.미국의 전 대통령이자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그랜트의 중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류큐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었던 중국의 지도자 리훙장은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개입하였고.
일본 제국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다.여기에는 당시 조선 정부와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그 핵심에 있었다.
조청수륙무역장정을 맺도록 강요하였다.
대신 세계무역기구나 국제통화기금의 규칙을 따르면서 미국이 중심이 된 안보체제 안에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이황(1502∼1571)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봐도 여던 길 앞에 있네 여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여고 어떨꼬 -도산육곡판본(陶山六曲板本) 저 매화에 물을 주라 삶은 쉽지 않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매화 사랑으로도 유명했는데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며.
이황은 이언적의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영남학파와 동인의 큰 스승인 유학자이다.죽기 직전에 ‘저 매형에게 물을 주라고 했던 일화로도 유명하다.